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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 감독님의 [호수길].
남다은 평론가가 추천하는 작품입니다!
시네마달 또한 추천한답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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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길






지난 2년간 한국 독립영화들의 가장 뜨거운 화두는 ‘집’이었다. 집을 지킨다는 것, 혹은 집을 빼앗긴다는 것에 대한 분노, 고통, 그리움, 두려움 같은 절실한 정조가 수많은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들에 어른거렸다. 정권의 신념이 되어버린 자본의 개발논리와 용산 철거민 참사의 트라우마가 이제 우리는 집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마저 걸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슬픔과 위협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투쟁의 현장으로 카메라를 들고 나선 다수의 영화들은 불합리한 현실에 대해 증언하거나 쫓겨난 이들의 심정에 귀를 기울였다. 그 때 정재훈의 <호수길>도 등장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상하다. 여기에는 전경과 철거민들의 대치 현장도,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억울한 외침도, 긴박하게 이들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다급함도 없다. 그 흔한 인터뷰조차 없다. 달리 말해, <호수길>은 철거민의 현실을 공유하면서도 전혀 다른 것들을 보고 있다. 그리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말한다. 푸른 하늘, 밝은 달빛, 아이들의 웃음소리, 산책하는 고양이, 싱그러운 바람이 여전히 존재하는데, 바로 그 곳에서 포크레인이 집을 부수고 주인을 잃은 강아지가 떠돌고 유령 같은 밤이 밀려온다. 도대체 지금 이 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파괴되는 터전 안에서 삭막해진 우리의 감각이 놓치고 지나친 것들, 그러나 <호수길>이 붙잡아 우리의 기억에 불러온 순간들. 죽음을 앞둔 은평구 어느 마을의 마지막 생생한 숨소리, 동시에 꺼져가는 숨소리가 여기 있다.

우리의 집이 부서진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산책할 장소를 빼앗긴다는 것, 우리의 추억이 켜켜이 배인 골목, 풍경, 공기를 더 이상 어슬렁거릴 수 없다는 의미와 다름없다. 적어도 <호수길>의 감독 정재훈에게는 그랬던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그렇게 오후의 햇빛을 받으며 ‘나의 동네’를 게으르게 숨 쉬며 걸어 다닐 수 있는 평화를 부당하게 잃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정재훈은 마을의 집들이 흙과 먼지로 사라져가는 그 시간에도, 아직 남아있는 순간들을 산책하며 구경하듯, 마을 사이사이에 고집스럽게 카메라를 세워두고 찍었다. <호수길>의 응시는 그러므로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스스로 한 마을의, 한 시절의 일부로서 사라짐의 시간 안에서 남아 있는 시간을 사는 것이다. <호수길>의 한없이 서정적이던 낮이 주인을 잃고 무너져 내린 집의 기괴한 울음소리(감독이 인위적으로 입힌 사운드는 정말 그렇게 들린다)가 가득한 밤으로 이어질 때, 카메라와 세심하게 시선을 교환했던 고양이가 얼마 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때, 우리는 이 마을을 잠식하는 낯선 시간의 그림자를 온 몸으로 느낀다. 무겁고 무섭다.

하지만 <호수길>을 보고나서 우리가 슬퍼하는 만큼 신기하게도 위로를 얻는다면 그건 이 영화의 건강함 때문일 것이다. 폐허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똑같은 폐허가 되어가는 자신을 내버려두는 대신, 어떻게든 자신의 심성을 지키려는 안간힘과 투명함이 이 영화를 지킨다.

(..후략)



* 작품정보

호수길 l 정재훈| 2009|72min
햇빛이 가득한 산동네.동네에는 나무도 있고, 사람도 있고, 동물도 있고, 집도 있다. 어느 밤, 동네에 알 수 없는 빛이 번쩍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