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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미동] 5인 5색전 그 첫번째 '김태일 감독전'의 후기!


[review] 세상을 밝히는 다큐멘터리스트에서 세상과 연대하는 다큐멘터리스트로, '김태일'의 20년



한국의 독립영화의 역사와 당시의 지형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 <변방에서 중심으로(96)>에 출연했던 김태일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부정확하지만 내용만 요약한다면) “사람들이 나에게, 세상은 많이 변했는데 너는 여전히 80년대 정서와 방식을 가지고 사느냐고 말한다. 나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 같다.”

그래 보였다. 그리고 소박하고 투박하고 질박한 사람의 느낌처럼 작품도 그랬다. 욕심 부리지 않고 요령도 부리지 않고, 두꺼운 책을 차근차근 쉬지 않고 읽어내는 모범생처럼, 강단 있게 조근거리는 감독이었다. 90년대에 봐도 80년대 사람 같고, 21세기가 되어서도 80년대 사람 같고 죽을 때까지 결코 그 모습을 잃지 않을 사람으로 보였다.

한결 같음에 대한 믿음으로 그의 작품을 보다가 푹 졸았던 적이 사실 많다. 특히 현대사의 주름 속에 묻힌 진실을 집요하게 조목조목 따져 들어갈 때면, 감독의 말이 맞을 거라는 신뢰가 안도감을 주어서인지 빠짐없이 잤던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너무 정직하고 꾸밈이 없는 서술 방식 때문이기도 할 거라고 변명을 해 본다.) 하지만 한국의 독립다큐멘터리 중에서 단연 인상적인 장면중 하나를 <어머니의 보랏빛 수건(95)>에서 볼 수 있다.

"어른 말을 안 들어서 그래.“

“네, 어머니?”

“네가 어른 말을 들었어야지.”

“네, 어머니.”

최장기간 장기수로 세계 기록을 세웠던 김선명 선생이 45년 만에 석방되어 아흔다섯의 노모를 만나는 장면이다. 아무렴 자기 신념에 따라 산 죄로 감옥에 간 양심수가 진작 어른 말을 들었더라면 하는 후회를 할 리 만무하다. 자식의 성정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노모가 다 늙어버린 아들에게 그런 핀잔부터 말할 리도 만무하다. 그 말들은 말 할 수 없이 그리웠다는 의미와 오랜 세월을 묵은 회한의 감정을 담고 있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일말의 회한이 생길 법한 소행을 저지른 자식이라면 그 대화에 마음이 아플 것이다.

김태일의 작품은 부당하게 은폐되려는 현대사의 진실을 밝혀내는 정의적 경향이 강했다. 단적으로 말하면 주인공이 ‘역사’의 진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이념대립의 그늘에 철저히 가리운 사람들로, <원진별곡(93)>의 산재노동자와 <22일 간의 고백(98)>, <4월 9일(00)> 등의 양심수는 그가 확신하는 정당한 역사를 증언하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감독에게 일신상의 변화- 아마도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활동 계획과 연관이 깊을 주거 지역의 변화 - 가 다소 일어난 후 다시 작품 활동에 박차를 가하면서 나온 <길동무(04)>를 보며 어떤 변화를 느꼈다. 또래에서 낙오된 스무 살 주희를 주인공으로, 감독과 인물의 정서적인 교차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후로 그는 감독의 시선이 집중하는 대상이 역사적 상흔을 품은 남성들로부터 확연히 변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다.

<농민약국(08)>과 <효순씨 윤경씨 노동자로 만나다(09>는 농촌에서 농민운동의 당사자로 살아가고 있는 여성 약사들이 주인공이며, 효순씨와 윤경씨는 제목 그대로 70년대부터 한국 노동운동의 주축이었던 여성노동자들이다.

<농민약국>은 비록 중편의 작품이 감당할 유력한 초점이 없이 농촌현실을 겉핥고 있지만 땅에 대한 아련한 선망과 연민이 느껴진다. 그리고 감독은 농민약사들의 활동을 따라가다가 “욕망을 줄이고 연대에 힘을 내라고” 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부쩍 이 “연대”라는 말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게 되는 이유는 감독의 변화가 이 한마디로 대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뭔가 또렷해지는 초점이 없어도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으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인 것이다.

연대는 표표히 주장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서로 돌보고 어루만지며 살아가는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마도 그 변화의 초석을 이미 <어머니의 보랏빛 수건>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때로부터 달라진 것이 있다면, 돌보고 어루만지며 살아가는 것이 주변적인 - 어머니의 - 기능이 아니라, 낙오적이며 배제되었던 땅에서, 다큐멘터리로서, 자신이, 주되게 담당할 가치라고 좀더 단단히 정립하게 된 것은 아닐까?


김태일 감독의 주제는 ‘역사’에서 ‘관계’로 전환이 이루어졌고, 그가 여성을 보는 시선은 어머니로서의 여성에서 연대자로서의 여성으로 자리 잡았으며, 감독의 성격은, 말하자면, 틀어진 뼈를 바로 잡아 맞춰주는 완고한 정형외과
의사였다가 관절염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불러다 연골에 좋은 요리를 해서 먹이는 요리사로 변모했다.
                                                                                                                                                          (다큐멘터리 감독 이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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