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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011-05-06 기사원문보기 >>
[뒤늦게 전하는 안부 ②]
'오월
愛' 광주시사회 취재현장-  "감독님, 제가 왜 울었을까요?"

 

 1980년 5월의 광주, 그 후 30여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아픈 기억은 점차 잊혀지고 있습니다. 5월 12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다큐멘터리 < 오월愛 > 를 통해 사라져가는 오월 정신을 다시금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영화의 개봉에 맞춰 배급사 '시네마 달'이 '30년 시간의 강을 건너 뒤늦게 전하는 안부, '안녕히... 지내셨나요?''라는 타이틀로 연재기사를 보내와 싣습니다. - 편집자말

 

 

▲ 시사회 장면나중에 정말 저 좌석이 꽉 차는 것 보고 감동 받았다.

ⓒ 정미경


올해로 31주년을 맞이하는 광주 5·18 민주화운동의 주제는 '관심'이다. '관심'이 주력용어가 되기까지 그동안 5·18은 점점 가속도를 더하여 우리 삶 속에서 관심 받지 못하고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런 5월에 경상도 출신 감독이 찍은 한편의 다큐멘터리가 이처럼 소원해진 5·18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사람들을 모처럼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지난 3일 오후 7시 30분 광주 서구 5·18기념회관에서는 5월을 다룬 다큐멘터리 < 오월愛 > 의 광주특별시사회가 열렸다.

시사회장에 한 시간 반 가량 먼저 도착을 했다. 행사장 입구에는 진행요원으로 보이는 두어 사람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상영시간 30분 전이 되어도 북적거려야 할 행사장이 한산하기만 하다. 배급사인 '시네마 달' 대표 김일권 피디나 감독 김태일씨 등은 오히려 느긋해 보이는데 괜히 내가 조바심이 났다. 상영시간이 임박해서야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행사장 입구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광주인권영화제 측에서 준비한 주먹밥이 임시로 마련한 상 위에 펼쳐지고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자연스럽게 섞여 주먹밥을 먹었다. 반가운 지인들도 여럿 만났고 그 중에서도 정말 몇 년 만에 보는 반가운 후배도 있었다. 주먹밥 앞에 놓고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오늘 내가 해야 할 일도 잊어버린 것 같아 내 본연의 임무인 행사 모습을 채집하기 위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도청 취사조' 자청한, 꿋꿋한 생활인 윤청자 선생

 

▲ 윤청자 선생님도청 취사조 하셨던 윤청자 선생님. 주먹밥을 드시면서 저렇게 계속 목이 메이셨다.

ⓒ 정미경


가장 먼저 윤청자 선생님 모습이 눈에 띄었다. 5·18당시 도청 취사조로 참여하셨고 영화 출연자 중 한 분이시다. 군대 이야기 좋아하는 남자들도 군대에서 취사병이었다는 과거는 극구 숨긴다는데, 당시 도청을 사수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한 시민군들의 종군 취사조를 자청한 '도청 취사조'는 최고의 여성전사로서의 영예를 부여 받았다. 지금은 광주 광산구 수완지구에서 민들레 꽃집을 운영하시면서 꿋꿋한 생활인의 자세를 보여주시고 계신다.

늦게 오신 관계로 허겁지겁 주먹밥을 드시는 와중에도 나에게 그 시절을 세세하게 옮겨 주시느라 열변을 토하셨다. 그러나 보니 선생님은 자꾸 목이 메고 주먹밥을 잘 삼키지 못하셨다. 영화 끝나고는 아무래도 선생님을 이렇게 편하게 독점할 수 없을 것 같아, 선생님을 편히 놔주지 못하는 내 욕심 때문에 주먹밥을 드시는 내내 급하게 물을 들이키셔야 했다.

"선생님. 도청 취사조까지 하실 정도면 여성으로서, 시위에 가담하는 정도가 매우 적극적이셨던 모양이에요."

"응, 사실은 내가 원래 회사, 로케트 전기 노조간부를 지냈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그 전부터도 학생들과 시민들 시위현장에 밥을 해다 날랐지."

"그럼 비단 항쟁기간에만 취사를 담당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여러 시위 때마다 밥을 해서 나르셨단 얘기네요."

"응. 쭉 그래왔어. 5·16횃불시위 때도 우리가 밥을 했고."

밥에서 밥으로 이어진 선생님의 지난날 여정은 꾸역꾸역 주먹밥을 삼키시느라 자꾸 생목을 올리면서 이렇게 이어졌다.

"이번 다큐멘터리에 나는 너무 감사하는 마음이 커요. 5·18광주는 완벽한 대동세상이었어요. 꿈에서만 가능한 세상이죠. 어쩌다 나를 비롯한 일부만 여기 출연하게 됐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당시 모든 광주시민들이에요. 누구나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총을 든 사람은 총으로 싸웠고 상황실 주변을 지나칠 수 없었던 여성은 자진해서 가두방송 마이크를 잡았고 어떤 이들은 숨어서 부지런히 등사기를 밀어서 투사 회보를 만들었죠. 아주머니들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주먹밥을 날랐고요. 어느 세상천지에 그런 일이 가능하겠어요, 광주니까 가능했던 일이죠. 휴우우."

마치 눈앞의 상황을 설명해나가듯 선생님은 격앙했다가 황홀해하더니 다시 울분에 차셨다.

"선생님은 쭉 그런 식으로 여러 활동들을 하셨는데 집에서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어 있던 사람들도 있었던 게 사실이잖아요. 나중에 그런 상황이 좀 허탈하다거나 개인적으로 배신감같은 감정이 들진 않으셨어요?"

"천만에요.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죠. 공포는 가장 즉흥적인 인간의 본능이에요. 더군다나 안전하고 싶은 것, 내 가족과 더불어 그 공포를 피해 가고픈 절박함, 그것은 바꿔 말하면 평화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잖아요. 그 평화를 위해서 우리도 그렇게 힘들게 싸웠던 건데, 평화에 대한 절박한 본능적 행동, 그건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처럼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이나 숨어서 그 상황을 비켜가고 싶었던 사람들이나 모두 한마음이었죠. 참여 여부를 떠나 우리가 그때 간절히 원했던 것은 모두 하나였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영화상영이 끝나고 나서 출연자 대표로 무대에 올라 인사말씀을 하실 때도 선생님의 논조는 한결 같으셨다.

"이 영화는 광주항쟁의 의의와 기능을 가장 교과서적이고 지침서적인 방법으로 표현한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이 영화를 대하는 저희 입장은 다소 회의적이었답니다. 그러던 것이 차차 감독님의 열의와 진심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출연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너나없이 그동안의 공허한 증언에 상당히 지치고 고통스런 상태였거든요. 그런데 이 영화를 맡은 감독님의 진심은 우리를 움직였고 이제 이렇게나마 성과를 내신 걸 고맙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젠 감독님께도 이 자리에 찾아와 주신 여러분께도 그날을 증언하는 사람의 한명으로서 무한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어느 화려한 여배우의 무대소감이 이토록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을까. 40여 명이 넘게 출연했는데 오늘은 대표로 두 분밖에 오시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5·18후에도 쭉 트럭행상을 하시다 지금은 중국집을 운영하고 계신다는 양인화 선생님이 꼭 뵙고 싶었다. 그런데 시사회장엔 못 오신다고 했다. 그 분은 당시를 회상하며 항쟁 기간 동안에는 도둑도 강도도 잠시 휴업을 했던 모양이라며 치안공백의 도시에서 단 한 건의 강도와 약탈행위도 발생하지 않았던 점을 강조하셨다.

 
518번 시내버스 안에서 시작되는 < 오월愛 >
 

다큐멘터리 < 오월애 > 의 한 장면.

ⓒ 시네마달

재스민 혁명에서 출발하여 지금 리비아 내전까지를 지켜본 심정으로는 양인화 선생님의 당시 회고담이 가장 구체적으로 와 닿는다. 5월 해방공간의 위대한 도덕성과 시민정신은 세계의 어떤 혁명도 흉내 낼 수 없는 완벽한 유토피아였다. 무시무시한 시민군 출신인 줄 모르고 속아서 결혼했다는 사모님. 그러나 사모님은 양인화 선생님을 각종 시위에 빠짐없이 등장하게 하는 내조자 역할을 톡톡히 하셨다. 사모님의 촌철살인의 유머 몇 마디는 관객들을 울다가 그만 웃게 했다.

가족적인 분위기로 주먹밥을 나눠 먹고 아는 사람들끼리 만나 얘기꽃을 피우느라고 정작 영화 상영은 약속시간을 훌쩍 넘어 8시가 다 되어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웃음꽃이 멈추고 여기 저기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1980년 5·18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경험을 담담하게 그려낸 다큐멘터리 < 오월愛 > . 영화는 망월동으로 향하는 518번 시내버스의 실내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쓰레기차에 실려 망월동에 버려진 5월 주검들의 행로를 따라 518번 번호판을 단 버스가 흔들리며 가고 있다. 영화는 주로미 조연출자의 조심스런 내레이션과 당시 기동타격대로 활약했던 양동남씨의 담담한 내레이션이 번갈아 가며 흘러나왔다.

한 시간 반이 넘는 영화는 당시 항쟁 참가자들의 경험담을 세세하게 전해주면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억지 감동과 눈물을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들의 5·18을 가장 진심을 갖고 가장 낮은 어조로 풀어낼 뿐이었다. 5·18단체 간의 분열로까지 이어진 전남도청 별관 철거문제에 관해서도 감독은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접근하려 했다. 여기에서 영화 내용을 설명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았던 그러나 또 다 안다고 할 수 없는 그날의 진실이었음은 틀림없다.

영화에는 리어카라는 소도구가 중요한 요소요소에 반전을 꾀하는 장치로 등장한다. 처음 첫 희생자 두 명의 시신을 터미널에서 금남로로 실어 나른 것은 초라한 리어카 한 대였다. 리어카에 실린 두 구의 처참한 시신으로 인해 시민들은 광주에 주둔중인 대한민국 국군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배고픈 시민군들에게 주먹밥을 조달하던 운반용 도구도 역시 리어카였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엄마 누나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시민군들에게 날마다 주먹밥을 해서 리어카로 실어 날랐다. 그리고 당시 주먹밥을 만들었던 아주머니들은 현재도 여전히 리어카 행상으로 고단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지금은 도심에서 거의 볼 수 없는 리어카가 화면에서는 가장 친숙한 소통수단으로 자주 등장했다.

 

"31년이 흘렀어도 아직 5월을 모르겠다"

 

다큐멘터리 < 오월애 > 의 한 장면.

ⓒ 시네마달

 
영화는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회고와 현재 삶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렸다. 인디뮤지션 '시와'의 애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그때부터 이어진 박수소리는 끊기는가 싶으면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하면서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그 박수는 관중들이 손뼉으로 보내는 것이 아닌 진정 가슴으로 보내는 존경과 찬사였다.

이어진 순서에서 제작진 및 출연자 대표가 무대에 나와 간단한 인사말을 하고 이어서 사람들과 서로 질문하고 답하는 시간을 진행했다. 5·18기념재단 김준태 이사장의 소감은 특히 많은 울림을 주었다.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다. 31년이 흘렀어도 아직 5월을 모르겠다. 그만큼 5월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광주시민은 모두 하나였다. 무엇을 위하여? 광주를 위하여,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하여."

당시 한 편의 시로 총칼과 대적해야 했던 무기력한 시인이었던 그는, 오늘 이 조촐한 단편영화 한 편이 사람들의 스러진 관심과 애정을 다시금 이끌어내고자 하는 몸부림을 남다른 감회로 지켜보았으리라.

옆자리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하던 29살 김인태씨. 그는 단편적으로만 보았던 당시 사진과 토막 영상 몇 편이 그가 그날 광주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노라 했다. 올해의 5·18 주제어로 부각된 '관심'이라는 단어에 더욱더 관심 갖게 하는 말이었다.

"바로 우리 부모님 세대가 겪은 이야기인데 제가 알고 있었던 것은 지극히 표면적인 것이었어요. 오늘 영화를 보고서야 비로소 뭔가 좀 알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도 저분들이 저렇게 비통한 심정으로, 딱한 처지로 살아가고 계신지 몰랐어요. 이렇게 자세하게 알게 된 건 처음인 것 같아요. 5·18이 이렇게 미완의 상태로 진행 중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까 제가 너무 몰랐던 것, 제대로 된 5·18교육이 부재한 것 등이 모두 아쉽게 느껴집니다."

김인태군은 이윽고 몇 줄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세 명의 여학생을 지목하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라 했다. 학교 친구들인데 자신과 달리 그 세 명의 여학생은 늘 이런 쪽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즉석에서 알게된 여학생들은 모두 전남대 법대생들이었다.

"저희는 늘 저희가 사는 세상을, 사회를 외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학과 공부에 늘 쫓기고 해야 할 공부도 많지만 오늘 같이 이런 자리는 웬만하면 빠지지 않아요. 그동안 보아온 5·18에 관한 영상들은 정말 많았죠. 그런데 이 영화는요, 단 한 번도 주목받지 못한 분들의 낮은 목소리에서 뭐랄까, 정말 강한 감동을 받은 것 같아요."

 

"감독님께 묻고 싶소, 제가 왜 울었을까요?"

▲ 가장 열렬했던 시사회 관중세 여학생 모두 전남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다. 좌측부터 신수아(가정교육학과), 정슬기(불어불문학과), 박선옥(산림자원학부)

ⓒ 정미경


이 세 명의 여학생 외에도 기억에 남는 세 명의 여학생들이 또 있었다. 그녀들 역시 전남대학교 1학년(가정교육학과 신수아, 불어불문학과 정슬기, 산림자원학부 박선옥)에 재학 중인 앳된 모습이었는데 5·18관련 행사에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시사회 한 시간 먼저 도착해 미리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데 가서 얘기를 나눠보니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이 정말 대단한 걸 느낄 수 있었다.

"5.18에 관련된 교육도 중고등학교시절 많이 받았고요 웬만큼은 알고 있죠. 하지만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 기회는 없었잖아요.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분들의 증언으로 엮어진 영화라니 기대가 돼요. 꼭 보고 싶어서 왔어요."

"폭도라는 누명을 벗기까지 그분들이 겪었던 고통과 긴 시간들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시위에 직접 참여했던 분들의 생생한 뒷이야기를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정말 감동적이었던 거 같아요."

"저는요, 그중에서도 그 5.18화원 아줌마 이야기가 정말 가슴 아팠어요. 저희들은 어떤 식으로든 금전적 보상 문제도 마무리됐고 세월도 많이 흐르고 했으니까 그분들도 5월에서 많이 멀어진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막연히 생각했는데 그분들께 5월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 같아요. 철저한 진상규명만이 그분들을 제대로 위로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맞아요. 아직도 행불자 가족들은 돌아가신 분들의 시신이 묻힌 곳조차 몰라 고통스런 세월을 살고 계시잖아요. 정말 그 부분에서 너무 눈물이 나왔고요. 그리고 마지막에 그, 도청별관 철거문제 같은 거 있잖아요. 전 날마다 도청을 지나다니고 현수막도 보고 그랬으면서 그동안 그런 문제에 대해서 너무 무관심했던 것 같아요. 정말 이번 영화는 그거예요. 우리가 너무 무관심했다는 거요. 어떤 유가족분이 그러셨잖아요. 5월이 점점 잊혀져 가는 거하고 아들이 끝까지 지키려 했던 도청을 지켜 줄 수 없는 것이 가장 마음 아프다고요."

세 여학생들이 각자 흥분해서 쏟아 내는 긴 소감들을 찬찬히 적고 연락처를 받고 헤어졌다. 이 여학생들과의 만남이 어쩐지 종종 이어질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이런 비슷한 장소에서 종종 볼 것도 같고 또 사람 동원해야 할 데 있으면 이 학생들 연락해야지 하는 음흉한 속내로 마음이 훈훈했다.

이번 다큐멘터리 영화 < 오월愛 > 에 대한 관중들의 열기는 시사회가 끝나고도 한참동안 제작진과 출연자 대표들로 하여금 무대 위에 다리가 저리도록 서 있게 만들었다. 끊임없는 질문과 답변들이 이어지면서 종국에는 답변자가 다시 질문자가 되고 질문자가 다시 답변을 하는 너나 구분이 없는 상태까지 이르렀다. 급기야 누구랄 것도 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하는 선문답의 경지에 이르렀다. 한 남성분의 질문은 강한 여운을 남기며 장내를 숙연한 침묵으로 몰고 갔다. 그는 단 한마디를 던졌을 뿐이다.

"감독님. 주변에서 다 훌쩍이는데 영화 끝나고 보니까 저도 울고 있습디다. 감독님께 묻고 싶소. 제가 왜 울었을까요?"

잠시 멍한 상태로 모두들 한마디도 못하고 그저 고개 숙이고 있는 사이 긴 시간이 흐르고 누군가 이윽고 정신을 추슬러 마이크를 잡았다. 후훅, 마이크를 불더니 그 누군가는 또 다른 자신의 5월 사랑 이야기를 시작했다. 5·18, 30+1년의 5월에 '5월愛'를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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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월愛] 공식블로그

*작품정보

오월愛(애) 김태일 | 2010 | 101min
올해로 30주년이 된 5.18광주민중항쟁. 항쟁의 마지막날까지 도청과 광주외곽을 지켰던 시민군들, 시장 상인들은 청년에서 중년을 훌쩍 넘었다. 이들은 평범한 광주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이들이 갖고 있는 광주항쟁의 기억은 이후 많은 삶을 변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