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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 http://blog.ohmynews.com/treeappl/entry/할머니-고생하셨어요-영화-속의-노년118-할매꽃



"할머니, 고생하셨어요!" - 영화 속의 노년(118) : <할매꽃>

영화 <할매꽃> 포스터



영화 속 할머니는 89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날카로운 눈매에 뽀족한 콧날을 한 할머니는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을 자리에 누워보내시다가 그렇게 떠나셨다.

나 죽거든 음식 많이 해서 손님들 배불리 대접하라고, 그렇게 하는 지 안 하는지 일어나서 볼 거라고
말씀하신 대로 자손들은 음식을 많이 해 손님들을 모셨다.

평생을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 사셔야 했던 할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넉넉하고, 다정하고,  
한결 같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실 수 있었던 걸까.

이념이 다르기에 친정 오빠와 남동생, 남편, 시동생이 겪어야 했던 모진 죽음의 세월을
혼자의 힘으로 9남매 기르며 할머니는 넘고 넘고 또 넘어야 했다.

한 사람의 인생에 새겨진 기억의 분량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 것일까.
역사의 흔적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만한 크기로 낙인이 되어 남겨지는 것일까.  


 

영화 <할매꽃>에 나오는 가족사진.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아기를 안고 계신 분이 외할머니.



영화 속 화자인 '나'는
평생을 정신병으로 고생하신 작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연히 할아버지의 일기를 보게 되면서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고, 들어본 적 없는 가족의 역사와 마주치게 된다.  

외할머니가 젊었던 시절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서로를 죽고 죽이는 비극은 얼핏보면 이념의 충돌 같지만
그안에 반상으로 나뉘었던 계급의 갈등까지 섞여 들면서 도저히 끝을 알 수 없게 이어진다.

외손자의 내레이션을 따라 가다보니 한 사건은 앞서 있었던 사건의 결과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다음에 일어나는 사건의 뿌리가 되는, 줄줄이 엮여져 있는 덩굴 같았다.

이땅에서 좌익 사상을 가진다는 것, 좌익 활동을 한다는 것, 그런 가족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
또 그런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몸으로 마음으로 질리도록 겪었을 텐데도
영화 속 사람들은 놀라울만큼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그 고통과 분노와 억울함과 원통함이 이미 안에서 다 삭고 삭아 녹아 없어진 것일까.
아니, 오히려 생생하게 남아있으나 고통이 뼈에 새겨져 아픔이 이미 자신의 몸의 일부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비극의 개인사나 가족사에 머물지 않는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되새겨 증언할 수 있을,
한 동네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해야 했던 우리 나라의 피맺힌 현대사와 맞물려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조국에 돌아올 수 없었던 일본의 조총련계 동포들,
거기서 또 북으로 가야 했던 사람들에게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놀라웠던 것은 어린 시절 보고 듣고 겪은 몸서리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감독 어머니의 당당함과 건강함이었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모른 척 잊고 살아도 될 것 같았는데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감독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영화를 찍어보라고 아들에게 권한다.

영화 내내 그렇게 자신의 의견에 당당하고 신념이 강한 분도
그동안 가깝게 지내왔지만 서로 원수라고 할만한 집안의 딸인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꺼내는 일에는
망설이고 또 망설이며 뒤로 물러서곤 한다.
그래서 더욱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는 일은 그러니 얼마나 야만적이며 악한 일인지.

더 놀라운 분은 할머니였다.
꺾이고 주저 앉을 것 같은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안고 살면서도 할머니는 쉼없이 나누고 베풀고 움직이신다.
끝까지 가지 못한 길, 남편까지도 가지 못하게 하고 붙잡아 앉힌 길에 대한 빚갚음이었을까.
참고 참으며 할머니는 사람 누구나 똑같이 대하며 한없이 너그럽게 나누어주신다.

사람의 위대함은 결코 겉으로 드러나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끝까지 살아내는 일, 그것도 내 상처에 묶여 있는 게 아니라 그 상처를 넘어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나누고 함께 사는 일, 그것이 바로 위대함 아닐까.

그래서 감독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그 마음 그대로 내게 깊숙이 스며 들었다.  

"할머니, 고생하셨어요! 다음 세상에서는 편히 사세요..."


 

<할매꽃>을 만든 문정현 감독이 관객의 질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영화가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에 나선 문정현 감독은 '손자에게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천사 같은 분!'이라고 대답했다.

가족의 일원으로 객관성을 유지하는 일이 어려웠지만, 나중에는 마음을 바꿔
내가 아는 만큼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생각을 하며 견뎠다는 문정현 감독.
그는 단순히 자신의 가족사를 담은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존재하는 것들'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 속 일들을 직접 보고 겪은 어른 세대가 아니라 이런 역사를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영화라는
관객의 발언이 있었지만,
나는 솔직히 이 영화에 눈길을 줄 젊은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오히려 같은 시대에 비슷한 일을 겪은 어르신들이 모여 함께 영화를 보면서
기억 속의 사건들을 꺼내 놓고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 자체로도 훌륭한 치유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누군가에게 털어 놓기만 해도, 또 누군가와 나누기만 해도 상처는 꾸둑꾸둑 말라 갈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서부터 영화 이야기를 퍼뜨려 나가도 좋을 것 같았다.

<할매꽃>은 3월 19일 극장에서 개봉 예정인데,
혹시 몇 사람이 모여서 영화 보기를 원하면 '공동체 상영' 방식으로 영화를 볼 수 있다.
공동체 상영 신청과 문의는 독립영화배급사 '시네마 달'(전화 02-337-2135 / 6).

영화 <할매꽃 Grandmother's Flower, 2008> (감독 문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