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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김준호 감독, “감성과 객관 사이, 가슴으로 찍어낸 다큐”


-첫 개봉작이다. 축하한다.

운이 좋았다. 빨리 데뷔한 거나 개봉 기회를 잡은 거나 모두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후배를 우리 사무실 전체가 도왔다. 선배들이 농담처럼 “이게 정말 네가 만든 거 맞냐?” 그러시더라.(웃음)

-언제부터 영상 작업에 관심을 가졌나?

내가 공대 출신이다. 사실은 안정적인 삶을 원했던 거다. 그런데 군대를 갔다 오면서 생각이 바뀌더라. 과연 조직 생활을 잘해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자유로운 집단에서 일하고 싶었다.

-자유로운 직업 중에서도 영상, 특히 다큐멘터리를 택한 건 어떤 이유인가?

일단 다큐멘터리가 재미있었다. 특히 마이클 무어의 작품처럼 방송용이 아닌 다큐멘터리를 접하게 되면서 더 강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어필하고 보여줄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그보다 더 단순한 이유도 있다. 영상 작업을 하는 동안은 여기저기 여행도 많이 다니고 자유로울 것 같았다. 마침 푸른영상 사무실이 우리 집 근처이기도 해서 푸른회원으로 가입해 영화도 보고 그랬다. 사실 이전엔 그곳이 정확히 어떤 집단인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2005년 가을쯤 그곳에서 일손을 필요로 해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그 작품이 문정현 감독의 <슬로브핫의 딸들>이었다. 이 인연으로 푸른영상이 일터가 됐다.

-대추리 현장에 대해선 원래 관심을 가지고 있었나?

아니다. 그 사안에 관심을 가진 건 현장에 들어가게 되면서부터다. 정일건 감독의 <대추리전쟁> 조연출로 처음 그곳에 가게 됐다. 내가 직접 카메라를 들진 않았을 때다. 그러다 5·4 행정대집행이 있었던 그날, 워낙 상황이 크다 보니 여러 대의 카메라가 필요했고 나도 따로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시작했다. 그 부딪침의 현장에 있으니 갑자기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충격과 분노가 느껴졌다. 그들은 시위 진압을 하러 온 게 아니었다. 오자마자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공권력이란 것이 이런 식으로 쓰이는구나 싶었다. 그날 부서진 그 학교는 대추리 어르신들이 젊었을 때 직접 쌀을 거둬서 만든 곳이다. 얼마나 충격이 컸겠나.

-그래서 단독으로 대추리를 찍기로 결심한 건가?

정일건 감독은 그날 이후 편집 작업에 들어갔다. 그동안은 내가 1주일쯤 있으면서 촬영을 했다. 그곳 사람들은 투쟁 기간 3년을 넘기면서 반사적으로 카메라에 거부감을 느낀다. 처음엔 내가 경찰의 끄나풀인 줄 알더라. 하지만 며칠 지나면서 금방 친해졌다. 서울에 올라와서 깨달았다. ‘나와 다른 삶이 있구나’ 하는 걸 말이다.

-돌아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카메라를 통해 그곳의 이면을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었나?

글쎄, 일단은 영상 작업에 대한 생각보다 거기서 살아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싸움이 될 때까진 그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었다. 서울에 올라온 후 자꾸 생각이 나고 괜히 불안하더라. 오늘은 또 어떤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됐다. 그냥 내가 이 투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할아버지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캐스팅은 어떻게 이뤄졌나?

내가 대추리에서 살았던 곳이 마침 지킴이 중 아는 형의 집이었다. 그 바로 앞 논이 할아버지의 일터였다.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와 알게 됐고 그를 따라 움직이게 됐다. 처음엔 나도 정말 철없는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거라 생각하나요?” 하는 질문에 할아버지가 일만 하시면서 “어떻게 알아?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어?” 그러시더라. 그걸 질문이라고 했나 싶었다.

-할아버지가 중심이 되면서 다큐멘터리가 감성적으로 변했다. 굉장히 민감한 사안을 전달하는 데 주관적 방식을 선택한 거다. 안 좋다는 말이 아니다. 다큐멘터리 역시 연출이 가미돼야 하니까. 이성보다 감성을 드러낸 이유는 뭔가?

사실 배경 설명이 좀 더 풍부해야 하는데 영화 속에서 할아버지의 힘이 워낙 강해서 다른 장면과 어울리질 않더라. 그래서 편집을 하면서 아예 할아버지 이야기 위주로만 가려고 한 적도 있다. 그러자 사무실에서 반대하더라. 마을 얘기가 들어가줘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어느 정도 절충했다. 안 그랬으면 한쪽으로 치우쳤을 수도 있다. 그냥 내 입장에선 연세 많으신 할아버지가 그렇게까지 지키려는 게 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 분께 많은 걸 배웠고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을 나 나름대로 택한 거다.

-작업이 끝난 이후에도 대추리를 방문한 적이 있나?

물론. 명절 때도 갔다. 현재 그 분들은 가이주단지에 계신다. 아직 완전한 정착 상태가 아니니 이도저도 아니고 그냥 붕 뜬 상태다. 텃밭을 만들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할 수도 없다. 정부 쪽에선 당연히 법적으로 처리해 줘야 할 문제에 있어서도 온갖 생색을 다 내며 선심 쓰듯이 해주더라. 그 싸움 이후 70~80대 고령의 어르신들은 일순간에 확 늙어버리셨다. 당시 많은 지킴이들도 함께했었다. 각자 다른 이유로 모여 함께하다가 또 이리저리 흩어졌다. 나 역시도 다큐 작업을 하고 있다. 모두 돌아갈 곳이 있었는데, 정작 주민들은 못 돌아갔다.

2009-05-18   정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