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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촌 - 참을 수 없는 도시의 어두움
김해규, 장연환의 평택 역사산책-여섯번째 이야기

 

평택시민신문 webmaster@pttimes.com

 

미군기지와 함께 형성된 마을

기지촌이라는 단어는 우리사회에서 밝은 빛이 아니다. 장길수 감독의 ‘은마는 오지 않는다’라는 영화에서처럼 기지촌에는 전쟁으로 상처입고 뿌리를 뽑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오면 비로소 생기를 얻는 기지촌.

   
평택에 기지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51년이다. 물론 고려 후기 몽고의 침입 때나, 임진왜란, 1942년 전시체제기에도 외국군 주둔기지가 조성되었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미군기지처럼 대규모의 병력이 장기적으로 주둔했던 적은 없었다. 미군기지가 하필 평택지역에 주둔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분분하다.

분지가 형성되어 적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는다는 설, 한국전쟁 때 격전지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그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설득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군비행장 등 군사시설이 존재하였고, 교통망이나 지리적 요충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미군기지는 평택군 송탄면 신장리, 서탄면 적봉리 일대와 일본해군시설대 비행장이 있었던 안정리 일대에 조성되었다. 기지가 형성되면서 송탄지역의 적봉리 원적봉, 가마골, 야리, 신야리와 같은 마을은 삶의 거처를 빼앗기고 집단이주하거나 흩어졌다.

기존에 군사기지가 있던 안정리 일대에도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구 대추리, 서정자 마을 등이 집단 이주당했다. 송탄에 주둔한 미군기지의 명칭은 K-55 오산기지였고, 안정리 기지는 K-6 캠프 험프리즈였다.

초기 미군기지는 엉성하였다. 규율도 엉망이고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여서 충돌도 잦았다. 본정2리 주민들에 따르면 1950년대 초에는 미군들이 나온다고 하면 동네 여자들은 숨었고 남자들도 몸을 움츠렸다고 하였다. 미군들은 총을 쏘아 함부로 가축을 잡아먹기도 하였으며, 신행(新行) 온 신랑을 동네청년들이 달아매자 폭행을 하는 줄 알고 총으로 쏴서 죽이는 일까지 있었다. 

뿌리 뽑힌 삶…뿌리 없는 삶

   
뿌리를 뽑혀 떠난 사람들의 터전에는 뿌리 없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오는 달러가 밝혀주는 환한 불빛은 가난에 찌든 빈농들과 뿌리 없는 전쟁 피난민들에게는 희망의 엘도라도였다. 미군기지 정문과 후문 앞에는 부대에서 나오는 과일상자, 종이박스로 하꼬방이 지어졌다.

하꼬방도 지을 수 없는 신장동 언덕배기에는 땅굴을 판 뒤 나뭇가지와 흙으로 지붕을 얹은 뗏막이 지어졌다. ‘판잣집’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하꼬방은 술집, 양색시집, 사진관, 식당, 민가들이었다. 어쩌면 1950년 당시 술집과 양색시집, 민가는 동의어였을 수도 있다. 

기지촌에 몰려든 사람들의 꿈은 미군기지에 취직하거나 장사를 하여 돈을 버는 것이었다. 1950, 60년대 달러는 지금보다 수 십 배의 위력이 있었다. 미군기지에 다니면 안정적인 월급과 함께 미제물건을 빼낼 수가 있었다. 당시에는 미군기지에서 빼내는 물건은 무엇이든 돈이 되었다. 반출된 물건은 기지촌에서 밀거래되었고, 다시 일반인에게 팔려나갔다.

밀반출된 것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햄과, 소시지, 버터, 치즈 같은 식료품이었고, 기름과 카메라 같은 고가품도 있었다. 때론 미처 소비하지 못한 밥, 음식쓰레기들도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K-55미군기지촌의 중심가였던 신장1동 제역마을(지골) 비포장 골목길에서는 햄과 소시지를 볶아 파는 노점들이 많았다.

나중에는 김치에 햄과 소시지, 치즈를 넣은 부대찌개라는 것도 만들어 팔았다. 평택지역에서 부대찌개로 명성을 날리는 최네집도 부대 앞 기지촌에서 시작되었다.

위세 컸던 미국달러 보고 몰려

   
기지촌 주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미군기지에 다녔지만 대부분은 상업에 종사하였다. K-6미군기지가 주둔한 안정리에는 쇼핑몰 좌우에 기지촌이 형성되었다. 기지촌의 중심은 미군전용클럽이었다.

안정리 특수관광협회 김웅(68세) 전무는, 1960~70년대만 해도 클럽을 열려면 교통부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클럽은 백인과 흑인 클럽으로 구분되었다. 한국인들은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의류, 식료품가게, 미장원, 이발소도 있었다.

일명 양색시 또는 양공주라고 불렀던 기지촌여성들도 기지촌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기지촌 여성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1960년대였다. 파주, 동두천, 연천 일대의 미군기지가 감축되면서 이주한 여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래 빈농이나 도시빈민의 자녀들이었다.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고, 동생을 공부시키고, 재수가 좋으면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이민을 가는 것이 꿈인 소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모여든 여성들이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1900여 명.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꿈처럼 희망으로만 가득 차있지 않았다. 돈을 벌기는커녕 몸만 망치고 혼혈 아이를 낳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여성들도 많았다.

팽성읍 도두리 출신으로 청소년기를 기지촌 일대에서 보낸 박후기 시인은 기지촌의 풍경을

“캠프 험프리즈의 겨울밤은 깊어가고
  맥심클럽 뒷골목
  툭, 툭, 툭, 언 땅 걷어차는
  클럽북소리 들린다.
  아라사 양복점 슬래브 지붕 밑
  씨방 속 같은 어두운 빈방
  하얀 발목을 묻고 밤새 너를 기다린다, 앨리스”
 (박후기,‘목필연가’ 중에서) 라고 썼다.

가수 김민기의 ‘기지촌’에서처럼 암울한 창가의 풍경보다는 덜 절망적이지만, 구름이 잔뜩 끼고 바람마저 부는 늦가을, 희망조차 사치인 것 같이 느껴지는 답답하고 서러운 시(詩).

지금은 소통의 사각지대로 변해가

   
신장동 K-55기지촌의 최고 호황기는 1960, 70년대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경제사정이 좋지 못했고, 그만큼 미군들이 흘린 달러의 위력이 강했다. 신장동 기지촌이 먹고, 놀고, 쇼핑하기 좋은 곳으로 소문나면서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하였던 미군들까지 전세기를 타고 몰려들었다.

하지만 요즘 기지촌 상황은 예전만 못하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달러와 미제물건의 위력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미군이 감축되고 김대중 정부 때 무료항공편이 중단된 것도 어려움을 주었다. 9.11테러로 미군들이 외출제한을 받으면서 한 번 더 타격을 입었다.

10여 년 전부터는 정문 앞에 쇼핑몰을 조성하고 관광객 유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근래 미군기지이전사업으로 재개발 바람까지 불고 있지만 미래는 불투명하기만 하다. 

안정리 기지촌의 전성기도 20여 년 전으로 끝났다. 미군이 감축되고 미국 내에서도 가난한 병사들이 미군에 지원하면서 좀처럼 돈이 풀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반미의식이 강해진 것도 불편한 요소다. 달러의 위력도 예전하고는 비교가 안 되고, 미제물건도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한 때 16개까지 늘어났던 미군클럽도 현재 4개가 휴업 내지 폐업 중이다.

유일한 희망은 미군기지 확장사업이지만 고덕면 일대에 고덕국제신도시가 조성되고 신장동을 중심으로 쇼핑몰이 활성화되면 안정리는 좀처럼 살아날 수 없을 것이라고 걱정이다. 미래를 함께 공유하지 못하는 소통의 사각지대로 변해가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김해규/한광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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